“ 언젠가는 지워질 거예요. ”
덥수룩하고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리거나 느슨하게 묶는다. 그 색이 언제부터인지 위를 향할수록 흐릿하게 바래버린 탓에 칙칙한 재를 연상시키게 되었다. 왼쪽 눈을 절반쯤 가리는 앞머리 밑으로는 홍채도, 동공도 없는 흐리멍덩한 백색의 눈동자가 자리했으니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비친다. 시체같이 생기 없는 피부는 여전하다. 그마저도 전부 검댕이나 먼지로 얼룩져있는, 단정함과는 제법 거리가 먼 요소들. 그렇지만 이것들은 다시금 잘 다듬어진 매무새의 복장과 비견된다. 비선형적이고 자유로우며 그렇기에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도 잠시, 오른 손목 안쪽에 새겨진 에피스타에는 어느새 완연한 신의 모습이다. 그것이 조화를 뜻하는가, 부조화를 뜻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나 그는 이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니 바라보는 자 또한 그릇된 상념을 담아 그를 시선에 담지 말지어다.
184cm|68kg
케프리
Tebe
테베
신성
Divinity
파빌로
케프리, 그가 부여받은 천명은 일출의 태양을 뜻하노니. 그는 태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의 도태된 것들, 혹은 그 불꽃 아래 타오르고 남은 위태로운 흔적들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곧 먼지의 신이라는 지위로 명명되어 모든 생의 케프리는 땅, 하늘, 물 어디든 광활하게 존재하는 찌꺼기들을 거느리며 지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따위의 것들과 정갈하게 빚어진 신의 육체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으니 어느 때나 자유롭게 상호 치환이 가능하다. 이 최후의 방어기제는 수호의 의무를 타고났으나, 그조차 막아낼 수 없는 공격에 맞부딪혀 육신이 찢어발겨지는 불상사를 막아주는 보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또한 낫과 장막, 창과 방패 등 작은 입자들로 구성된 먼지의 군집은 그 형태와 크기에 제한을 가지지 않는다. 재앙을 벨만한 날카로움과 재앙을 막아낼 만한 단단함까지도 너끈히 만들어낼 수 있으며 때로는 살아있는 것들을 흉내 낸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케프리의 신전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 구덩이가 산발적으로 존재하는데,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의 대부분은 먼지로 이루어진 뱀이며, 때로는 작은 새가 날아오를 때도 있다.
아샤
Asha
팔뚝에서 검지 끝까지를 감는 금속 파이프와 비슷한 액세서리 모양이다. 신성으로 다루는 입자들의 응집력과 결속력을 아샤를 매개로 하여금 강화시켜 그 강도를 보정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손을 통해서 신성을 사용한다는 무의식을 고려하여 제작되었으며, 동화가 이루어진 이후 신성의 사용량이 증가할 경우 아샤의 파이프 길이가 늘어나는 등의 외형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어쩐지 시큰거리는 손목 탓에 그 움직임을 보조하는 추가 기능이 줄줄이 생겼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 아주 유용한 듯싶다.
성격
Personality
신은 자식이자 어버이이며, 그렇기에 외따로 떨어진 존재
따라서 그 무엇도 가질 수 없으리니
그러므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도다.
1. 본질
가볍거나 무겁다.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다. 무엇도 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다가도, 사소한 것에 매몰되어 사흘 밤낮을 책 더미에 파묻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책장 하나를 넘기는 몸짓마저 느리고, 어색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눌하기까지···. 그렇지만 그가 적어내려가는 글씨는 무엇보다 단정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마저도 본디 반듯하게 빚어져 세상에 내놓아진 듯한 느낌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변덕스러움을 관철하는 성정마저 어느샌가 그 신의 본질이 되어버린 것인지, 테베의 주변인은 그를 설명하는 행위 자체를 꺼려 했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널리 아우르게끔 만든 좋은 신이다, 라는 무의미한 문장마저도 그 낯이 늘 함께하는 은은한 미소로 인하여 볼품없이 퇴색된다. 이것은 그가 진정으로 크게 웃음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므로. 그렇다면 테베는 나쁜 신인가, 라는 물음은 어떠한가. 그러나 이마저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는 가식을 모르고, 어둡고, 미온적이지만, 따듯했다. 정형화된 틀 안으로 스스로를 구겨 넣는 행위의 마땅함에 대해 재고한 끝에 그는 그 자체로 존재하기를 택했으니. 스스로를 이해한다.
2. 위태
삶의 종장을 목전에 둔 주름진 손에서 풍겨오는 삶에 대한 미련과 슬픔, 혹은 정 반대의 꺼지지 않는 열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운명과도 같은 냄새. 사그라드는 삶의 뒤를 바라보는 인간의 눈동자는 테베의 마음속으로 깊숙이 사무친다. 그는 인간에게 존칭을 허락하지 않았다. 먼지와 쓰레기, 타다 남은 잿더미의 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무릎 꿇는다. 고요한 병상 옆을 지키는 테베의 가려진 눈은 우수에 차있지도,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드리우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은 완연하게 슬퍼하는 것이다. 존재하는지도 모를 지옥을 두려워하는 이의 죄를 사하는 손짓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는 부족함에도... 테베는 그들의 어깨에 시체보다 창백한 손을 얹어줄 수 있었다. 신은 굳건하다. 동시에 나약하다. 인간과 다를 게 무엇인가. 우리와 나는 위태로운 감정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심장이 뛰는 존재이므로. 스스로를 마주한다.
3. 애정
테베는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그렇기에 완전히 인간스러운. 인(人)에 대해 꿈꾼다. 그것이 인간을 욕망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긍정의 대답이다.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 또한 정답이다. 어버이와 자식, 스승과 제자, 교차하는 친우들과 같은 인간이기에 만들 수 있는 세계와의 연결고리. 태초의 삼신이 세계를 구해내어 그들을 이 하늘 위에 반영원 토록 살게 만들었으니, 그는 영원히 만들 수 없는 세계와의 연결고리 같은 것들. 그 신은 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구태여 사유하고 상상해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는 이를 따듯함이라고 칭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이를 다정함이라고 칭했으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테베 자신마저도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신이 인간답게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절대성 앞에 좌절하고 눈물지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기도와 염원 앞에 묶여 희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테베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답을 찾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는 선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어색하게 웃고 말았지만, 후회로 점철되어 매몰당하기에 세계는 비정하게도 아름답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 또한 유한하다. 그러니 나의, 나에 의해, 나를 위해 사유하고 사유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리하여, 스스로를 사랑한다.
하늘이 곧 무지 앞에 선 자에게
순리와 섭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마주 하라 이르거늘
나는 그들의 염원과 기도를 사랑하는 자임을 깨닫노니
마땅히 선의를 베풀 줄 알고 사소한 아픔을 감수할 줄 아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기타
Etc
1. 케프리
▶ 노인들의 신으로 알려졌으며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삶의 끝자락을 동행할 의무를 지니고 태어났다. 케프리와 그의 신도들은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웠으나 동시에 누구보다도 죽음을 멀리하고, 그 신앙은 죽음을 경외시하고 주어진 삶을 갈무리하는 행위의 마땅함에 대해 고뇌하는 실천적인 성향을 띤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서술하자면, 그들은 예측하거나 준비할 수 없는 죽음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이를테면 전쟁과 재앙에 의한 죽음 같은 것들.
▶ 그와 함께하는 신도들의 특이한 점으로는, 케프리'만'을 섬기는 신도의 숫자가 매우 적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대부분이 노인인 신도들 중 절반은 그들이 젊었을 적 본래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 여전히 건재하며, 나머지 절반의 경우 별다른 신앙생활이 없었지만 그 나이가 노년기에 접어들고 난 이후 신전을 찾게 된 자들이다. 그마저도 달, 해를 넘겨 오랫동안 머무르는 인간을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케프리의 신전이 가지는 의미는 잠시 들렀다 제 길을 찾아 떠날 이들을 위해 지어진 세계의 틈새이자 시간의 골짜기. 이는 곧 소박한 등대와도 같았으니 모든 생의 케프리가 신전 밖으로 잘 나서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다.
...까지는, 입에서 입을 통해 평이하게 오르내리는 먼지의 신에 대한 가벼운 발화들.
이후로는 그들 모두 쉽사리 입 밖으로 내기를 꺼려 하는 것들에 대한... 그가 마주하지 않고자 했던...
플로리타의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전승되던 케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존재했으니,
2. 그리고
LL 548 보라, 그를 따르던 종들에게서 역병이 창궐하여 먼지와 재의 신을 가깝게 할 것인즉 죽음이 멀지 아니하니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스스로 종적을 감추시어 창공에 구원을 베푸셨노라.
▶ 신도가 아닌 자들이 케프리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너 나 할 것 없이 내뱉는 단어가 있다. 인간 사이에 태어나 인간으로 자라고자 하였으나 인간적인 죽음조차 맞이할 수 없었던 낙오자. 세계의 모든 쓰레기들을 털어 넣어 빚어놓은 듯한 볼품없는 신. 책장 하나를 빼곡히 채운 경전의 모든 문장은 수천 년간 반복된 그의 과오를 기록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생마저 아름답다고 포장하기 힘들었던,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사랑받고, 인간과 사랑한 모든 역사의 비참한 끝에 대해. 인간에 의해 죽고, 인간을 위해 죽고, 인간과 죽어버린 형편없는 끝에 대해,
LL 2609 죽음이 가까웠을 때 우리의 신이 걸음 하심에도 종들 사이에 널리 전하여진 거짓이 거세 저항할 수 없는지라. 우리의 신으로 인하여 죽음이 걸음 하리라 어린 종이 울부짖었나니 스스로 그 손에 목숨을 잃었음에 비탄의 강이 흐르나니...
▶ 읽어내렸던 과거 언젠가의 그는 닥치지도 않은 미래에 좌절해 자멸했으며
▶ 읽어내렸던 현재 어드메의 그는 역시나 다를 바 없는 전개에 좌절하였으나, 딛고 일어섰다.
LL 5775 어린 신께서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였으니 슬퍼하는도다. 경전의 활자에 파묻혀 성지를 봉쇄하시니 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재로 화하시메 어리석음을 마주하려는 자들은 필히 기억할지어다.
▶ 그렇다면 그 둘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었는가... 라는 의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거의 실패가 미래의 실패를 내정하지 않듯, 현재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그리지는 않는다. 우연인가, 묻는다면 정답일 테고. 필연인가, 묻는다면 그것 또한 정답이 될 테다. 중요한 것은 테베가 궁상맞게 짓무른 눈가로 자그마치 몇 년 간 신전에 틀어박혀 읽어내린 경전 더미 사이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리지 않고 (그는 상상을 초월하게 나약하다.) 결국은 비척대며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다지도 사소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언제나와 같은 한결같음이다.
3. 테베
▶ 제 2 클랜 티리아 메인 함선에 신전이 위치한다. 명목상 신전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조그마한 책방과 다름이 없다. 언제부턴가 대들보 하나가 묘하게 비틀어졌지만, 어째서인지 그대로 놔두었으니 그곳의 천장은 조만간 쏟아질 것 같이 위태롭다. 부근의 책장 또한 기울어져 그 앞을 지나는 자는 항상 머리를 조심해야 한다.
▶ 매번 같은 클랜에서 탄생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매번 신전이 위치한 곳에 정착했고, 이것은 구역 재정립 이전과 이후를 아우르는 공통점이다. 그의 탄생과 죽음, 연혁과 모든 삶에 대한 기록물 또한 신전 내부에 도서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으나 열람 여부는 신의 자율 의지에 맡기고 있으며, 케프리는 이제 단 두 번을 제외하고 그 기록물들을 읽고자 한 적이 없다고 기록될 것이다.
▶ 52번째 환생을 거듭했다. 1 클랜 바브리치에서 직전의 삶과 26년의 공백을 두고 태어났으며, 올해로 질기게도 98년째 해를 맞이한다. 탄생 직후 부모를 가진 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바브리치 마공학자의 이름을 따 이명을 짓게 되었는데, 그 공학자는 생산 시설의 구석 먼지 구덩이에서 테베가 뭉쳐 태어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간이다.
▶ 셀라 해산 이후로는 재앙 토벌도 뒤로한 채 늘 그랬듯 미진한 행보를 보였고, 6035년을 맞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신전의 문을 걸어 잠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서술하는 것이 맞다. 검고 하얀 먼지가 신전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버린 채 고요하게 가라앉은 기간이 자그마치 14년이다. 이후에서야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 묻는다면, 그저 책을 읽었다고 답했으니... 부끄러움에 구겨지는 낯짝을 보고 싶다면 그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는 농담이 신도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 책뿐만 아니라 모든 기록과 관련된 매체를 읽는 행위를 좋아한다. 매 생마다 그랬다. 늘 삶을 마치기 전까지 자신의 책방에 있는 책을 전부 읽고자 했으며···. 당연히 성공한 적은 없다. 다음 환생을 목전에 둔 지금도 그는 여전히 책방에 쌓인 책들 중 절반도 읽어내지 못했다. 독서량이 많다고 의견을 나누는 토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다지 학술적인 논의를 하기에 적합한 상대는 아니다.
▶ 개인적인 부분에 관한 사실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추측하건데 모든 인간들과 시간을 보내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 같이 책을 읽거나, 마나 필드 아래 조성된 녹지를 산책하거나, 높은 건물들 사이 구석진 상가에서 식사를 한다거나, 기타 서술하기조차 민망한 사소한 것들까지. 그들은 신과 신도, 그리고 동시에 친우이다. 요즘들어 그는 노인뿐만 아니라 아이들과도 종종 어울렸는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스스로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느껴간다.
▶ 새로운 삶을 부여받고 난 이후 과거에게서 이어받고자 하는 것은 응당 짊어져야만 하는 최소한의 것들... 신도와 신전, 타고난 숙명과 의무를 행하는 법... 잔재로 남아있는 기억의 편린에 대해서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는 척을 했으나.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을 제 스스로 만천하에 드러내버렸으니, 이제는 누구보다 생을 건너뛴 인연에 얽매이고 슬퍼하며 웃고 사랑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가움을. 그 무엇도 아닌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 신성 때문인지, 평소 먼지 구덩이에서 생활하기 때문인지, 늘 달고 다니는 기침에는 핏덩이가 섞이고 간헐적인 호흡은 불규칙하다. 건강 상태를 묻는다면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최악의 최악을 달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목울대를 거슬러 올라오는 날카로운 비릿함에도, 순간순간 숙주 안에 켜켜이 쌓여가는 먼지에도 살아온 시간이 있으니 그저 그러려니, 무던하게 웃고 만다.